박무, 2020
날씨가 흐려서 구조할 수 없습니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말이 사라졌다. 텔레비전은 유속이 빠른 바다와 침침한 하늘을 오래도록 내비쳤다. 자연의 일로 넘기는 듯한 태도였으나 구조를 더디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이었다. 선장과 선원이 육지로 가는 배에 필사적으로 뛰어올랐다.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죽음이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그날의 무책임함은 걷히지 않고 이어졌다. 증언이 뒤바뀌고 ‘모르겠다’는 말이 전염병처럼 떠돌았다. 누구도 이 비극에 대해 책임지고 싶지 않아 했고 서로 패를 넘기기 바빴다. 국가의 수장이 카메라 앞에 서서 눈물을 흘렸지만, 눈물 몇 방울로 메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촛불을 들었다. 진상규명과 특별법, 정의 구현을 목놓아 외쳤다. 바뀌리라 믿었던 시간이 있었다.
6년이 지났다. 여전히 왜 그 배가 가라앉았는지, 왜 그들이 죽어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참사는 분열을 낳았고 분열의 곁가지는 개인의 영역을 공격했다. 국가와 구조라는 커다란 덩이에 반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검열하는 일, 개인 대 개인의 싸움으로 퍼져갔다. 참사의 단어인 ‘세월호’는 어떤 이들에게 기생충과 동의어가 되었다.
사건과 연관된 자리를 몇 달간 돌아다녔다. 팽목항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목포 신항에서 마주한 세월호는 옛일인 양 낡아 있었다. 기억 저장소 앞에서는 전쟁이라는 만성 불안을 한껏 갖춰 입은 노인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었다. 기억이라는 것은 대체로 오류이고 각색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운 장면만이 남아있었다.
‘사건 직후에는 진상규명에 대한 현수막이, 그다음에는 봉안당 설치 반대에 대한 현수막이 있었어요. 이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안산에 도착했다. 고잔역에서 내리면 학생들과 유가족들의 장례가 이루어진 고려대학 병원이 바로 앞에 있다. 공사장 옆으로 세월호 기억 교실이 있고 빌라촌을 지나면 낮은 언덕 위에 단원고등학교가 있다. 벚꽃이 그려진 벽을 따라 걷다 보면 안산 분향소가 있던 화랑 유원지가 나온다.울창하게 솟아난 아파트가 중첩되어 보이고 곳곳에 교회가 빛을 내고 있다.
사건과 관련된 곳들 중에 가장 침착하다고 느껴졌다. 많이 앓은 탓일지도 모른다. 사고 이전에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꼬리표가 싫어 도시를 떠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죽음을 기리는 행위와 지우려는 행위가 불안하게 섞인 채로 도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생명, 터, 안전, 관광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서늘함을 느꼈다. 일어나면 안 될 일의 연장 선상이기에 무엇이 옳은 풍경이라고 제시할 수 없다. 죽음을 가릴수록 자꾸만 죽음이 고개를 넌지시 내밀었다. 우리는 아직도 사고 해역에 갇혀있다. ‘모르겠다’는 말이 끝나지 않는다면 영영 탈출할 수 없을 것이다.